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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일상다반사

오에 겐자부로와 나

22세기 2010. 5. 3. 03:10
0. 오에 겐자부로와의 첫 만남

올 봄, 나는 한 권의 일본 소설과 함께 따듯한 봄을 보냈다.

갑자기 왠 일본 문학이냐구?

어렸을 때에는 만화, 애니메이션, 드라마를 통해서만 일본 문화를 접했지만,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문학도 읽고 싶었다
.

그리고 정말 일본 문학에 깊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건 한 교수님 덕분이다.

이번학기 전공 외 수업중 <일본문화산책>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있는데, 전주대학교 언어문화학부 서은혜 교수님의 수업이다.
일본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책과 교수님을 통해 배우는 수업이고, 지리, 역사, 사회 부분을 배우고 나니 자연스럽게 일본의 문학에 대한 부분이 잠시 수업시간에 언급되었다.

 
일본에는 노벨 문학 수상자가 두 명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그런데 나의 관심은 첫 일본인 노벨 문학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보다 오에 겐자부로라는 사람에게 더 갔다.
교수님의 들려주신 일화를 들어보니 둘의 성격이 판이하게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 시상식때 일본어로 일본 고대 소설의 한 부분을 읽었다고 한다.
그가 보여준 태도에서 전형적인 일본 우익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싫었다.

그에 비해, 오에 겐자부로는 "애매한 일본과 나"라는 연설문을 영어로 발표 함으로써,
일본인인 그가 세계와 소통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그런 오에에게 반하게 되었다.

오에의 작품이 읽어 보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께 여쭈어 보니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신다.
찾아보니 학교 도서관에는 없었다. (헉)
다음시간에 교수님께서 책은 찾았냐고 물어보시는데, <개인적인 체험>은 학교에 없어서 오에가 쓴 다른 책인
<히로시마 노트>만 빌려 보았다고 말씀 드렸다.

교수님이 다음 수업시간에 나를 부르신다.

"어, 충열아. <개인적인 체험>이야. 내가 번역한건데, 관심이 있어 하는거 같아서 선물 하는 거야^^"

이렇게 나는 오에를 만났다.



1. 오에 겐자부로가 되다

나는 이 소설을 읽게된 동기에 대해서 '우연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말은 그렇지 않다.

이건 또 무슨 소리? 필연이라는 건가?

교수님께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아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수업시간중에 학생들 전부에게 말한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히카리, 빛이라는 뜻이다. 이 아들은 뇌에 장애가 있어 정상적인 지능은 아니지만 지금은 클래식 작곡을 한다고 한다.
오에는 처음에 아들이 태어나고 많은 심경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방황도 했다고 한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나는 오에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어지러워졌다. 왜 일까?

사실 '장애'라는 말은 나와 큰 관련이 없다. 누가 봐도 내 신체는 장애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 가족중에 장애를 가진이도 없고, 주변 사람들중에도 그런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장애는 내 사전에 없는 단어인줄 알았다.

그런데 대학 1학년때 십자인대를 크게 다쳐 군대까지 면제 받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보조기 따위를 차지 않아도 되는 정상인에 가깝지만, 나는 처음으로 크게 다리를 다치고는 많이 방황을 했다. 왜냐하면 분명 몸이 힘든 경험을 해본적이 없는 나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미친 말"이었는데, 그 말의 다리가 부러졌다. 어떻겠는가. 실제 말이라면 안락사를 시킨다.

수술 후 한동안 너무 괴로웠다. 재활치료도 꾸준히 잘 했어야 하는데 학교를 익산에서 전주로 오가느라 꾸준히 하지 못했다.
왼쪽 다리를 차라리 로봇 다리로 교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 아이로봇 탓이야!)
장애로 인정도 안되는, 남들도 누구나 격한 운동때문이라면 다칠 수 있는 병을 가지고 나는 2년 동안 혼자 죽을 것처럼 걱정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니 몸의 균형이 틀어져서 내가 꿈꾸는 22세기 까지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한 번의 수술을 더 했다. 2009년 2월, 다리 뼈에 박아 두었던 철심 하나를 빼며 내 다리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또 쓸데 없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나의 진짜 장애일까?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마음의 장애.
'내가 아니라, 나의 자식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어쩌지?'라고 상상했다.
우연찮게도 이 시기 나는 "인간 극장"이라는 프로를 보면서 많은 장애가족을 보고,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의 딸이 장애가 있다는 이야기도 듣고, 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니며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부쩍 많이 보게 된다.

오에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의 아들도 장애아란다. 나는 오랜만에 척추를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꼇다.
'어떤 사람일까 오에는', '이 사람은 어떻게 장애아를 받아들였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에와 대화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책을 통해서.

2. 하늘을 날 수 없는 새

책의 주인공은 27살의 '버드'라는 청년이다. 버드라는 이름은 주인공이 소년시절 불량친구들과 지낼 즈음에 생긴 별명이다.
입시 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을 하지만 아프라카 하늘을 보는게 버드의 소원이다.

버드에게는 곧 출산을 앞둔 부인이 있다. 버드는 태어 날 아이와 부인을 위해서라도 오늘도 수업에 들어간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병원에 도착한다.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마치 죽음이 깃들어 있는것 같다.
아이가 이상하댄다. 장애가 있댄다. 버드는 궁금하다. 하지만 버드는 곧 '차라리 보지 말 걸'하고 싶어진다.
왜냐구? 아이의 머리가 두 개다. 샴쌍둥이일까? 아니다.
아이는 헤르니아라는 병명을 부여받았다. 아직 이름도 없는 아이인데 말이다.
두개골 뼈에 틈이 있는데 그 곳을 통해 뇌의 일부가 빠져나와 혹처럼 아이의 머리에 달려있다.

"장애아가 태어났다."

버드는 이 사실을 부인에게 알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만은 알아 버렸다.
'나에게 장애아가 생겼다는 걸' 말이다.
버드는 그 아이가 '스스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의학 해부용으로 자신의 첫 아들이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아프리카 하늘을 날고 싶던 새에게 한 아이 만한 커다란 혹이 생겼다.

3. 어둡고 질펀한 하늘을 방황 하는 새

버드에게 대학 시절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버드는 현재의 부인과 결혼을 했고 여자친구 또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태어난 이 시점에 버드는 자신의 옛 여자를 찾아간다. 자신을 한때 어둠에 가두었던 한 병의 위스키와 함께.
여자의 남편이 죽었다. 자살을 했단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이 죽은 그 여자의 '이성'도 남편과 같이 죽어버린 느낌이다.
둘은 오랜만에 만났다. 술을 들이킨다. 취한다. 하지만 첫 날은 다른 것을 할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버드는 지금 또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행위'를 할 수 없다.
이미 그에게는 '태어나서 그를 곤욕스럽게 하는 아기'가 병원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게 그의 숨통을 조여 온다.

버드는 다음날 술에서 깨어나 자신의 수업에 간다. 하지만 그 수업은 가관이었다. 그는 숙취로 인해 바닥에 토사물을 뱉어낸다. 누군가 분노한다. 그는 교실에서 빠져 나와 병원으로 간다. 아이는 아직도 끈질긴 목숨을 유지한체 살아있다.
버드는 여자 친구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섹스를 한다.
다음날 병원에 간다. 아이는 여전히 살아있다. 버드는 여자친구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또 섹스를 한다.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현실 부정을 버드는 섹스를 통해 찾으려고 한다.
거기에 여자친구는 위로를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현실은 여전히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연락이 또 온다. 내일 찾아 오란다.

        "저는 수술을 거절하고 싶습니다." (pg. 232)

버드는 다음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말한다. 그로서 아이는 곧 죽게 될 것이다.


4. 새가 죽었다

병원에서 아이를 퇴원시킨 버드는 여자 친구가 소개 시켜 준다는 의사에게 가기로 마음 먹는다.
아마 소개 받을 그 의사는 여자 친구의 아이를 낙태 시킨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여자 친구와 함께 간다.
두 사람이 병원에 찾아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중간에 경찰을 만나기도 한다. 떨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둘은 결국 아이가 들어 있는 바구니와 함께 병원에 도착한다.

버드는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 그리고는 아이를 두고, 그렇게 여자 친구와 함께 남색가의 술집을 찾아 병원을 떠난다.

술집에서 여자 친구는 버드에게 자신과 함께 '아프리카에 가자'고 설득한다. 혹도 떼어냈으니 말이다.
아프리카에 가서 같이 살자고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버드의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만약 내가 지금 아기를 구해 내기 전에 사고로 죽는다면 지금까지 27년의 내 삶은 말짱 무 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잡았다." (pg. 273)


버드는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아들을 '죽일뻔한' 생각을 죽이고 말이다.

그렇게 책은 다소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해피엔딩을 선사하며 마지막 장이 넘어간다.

5. 버드는 누구인가?

분명 오에 겐자부로가 이 책을 쓰게 된 연유는 자기 자신의 장애아 아들 히카리의 존재가 역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분명 책 속의 버드는 오에 겐자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책의 엔딩에 잘 나와있다. 왜냐하면, 책을 읽다 보면 아이의 죽음을 생각하겠지만, 작가 오에는 그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이 현실에서나마 한 번 쯤은 죽길 바랬던 아들 히카리를 그는 그렇게 작품속에서라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책의 엔딩으로 인해 오에의 작품은 많은 비평과 비난도 따른다. 독자들의 기대를 져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 것이, 이것은 오에 겐자부로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체험"이지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다.
우리 누구도 아이의 머리에 혹이 달린채 태어나고 그것을 '자식' 이라고 불러야 하는 일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나도 나 자신을 버드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아직도 분명 '나에게도 장애아가 생길지 몰라'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떨칠 수 없기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실제로 내가 결혼하여 자식이 정상으로 태어난다 해도 나는 그 전에 버드와 같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장애아를 일부러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나는 버드와 오에 겐자부로를 통해 내 자식을 한번 죽여보고, 그 자식을 죽일뻔한 '내 자신'을 미리 죽이고 싶은 것이다.

6. 맺음말

책은 좋았다. 그리고 오에의 책은 다소 외설적인 표현도 많았다. (그럼 나는 외설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흠)
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블로그를 통해 서평 한 것을 읽어보니 분명히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비평과 '번역'에 대한 비평도 있는 것 같다. (교수님도 이런 사실을 아실까나?ㅋ)

나도 안다. 번역을 해봐서 안다. 그래서 느낀 것이 이 책을 읽는 진정한 재미는 원문 일본어로 이 책을 읽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일본어 실력은 그렇게 책을 술술 읽을 실력이 되지 않고, 아쉽지만 나의 전공은 '일본 문학'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이 책을 두 번 더 읽을 것이다.
처음은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만 집중해서 읽었지만, 다음번에는 오에 겐자부로의 표현력을 습득하는데 집중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번 더, 나는 미래의 부인에게 이 책을 읽어 주고 싶다.


개인적인 체험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오에 겐자부로 (을유문화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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